[3·1운동 100주년] 대구 3·1운동길서 만난 ‘100년 전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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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대구 3·1운동길서 만난 ‘100년 전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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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대구 3·1운동길서 만난 ‘100년 전 그날’

입력 : 2019-02-25 00:00 

대구 3·1운동길을 찾은 관광객들이 3·1운동 계단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김덕영 기자
 
오직, 대한독립만세
신명학교 학생들, 조끼허리 달아 매며 일본군에 잡히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 
계성학교 학생들, 등사한 독립선언서 솔숲길 통해 집결지 서문시장까지 옮겨 
학생·종교인·상인 등 각계각층서 모여 청라언덕까지 “독립만세” 부르짖으며 행진

그 후로 꼭 100년이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이 열번. 2019년 3월1일은 우리 선조들이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피를 토하면서 뜨겁게 부르짖던 3·1운동으로부터 꼭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100년이 지난 뒤에도 우리 가슴에 ‘대한독립만세’가 절절히 울리는 까닭은 비단 우리 헌법 전문에서 그 정신의 계승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여전히 만세의 울림이 남는 것은 대한의 독립이 내게는 자유와 존엄을, 내 이웃에게는 ‘살 권리’를 안겨준다는 사실을 절감한 그때의 우리 선조들 덕이리라.

그날의 날씨는 어땠을까. 질문은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3월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확산돼 대구에 닿은 것은 일주일 뒤인 3월8일. 봄의 시작이 3월부터라지만 여전히 쌀쌀한 날씨였을 것이다. 어쩌면 꽃샘추위에 몸을 떨었을 수도 있다. 전국 각지에서 눈발이, 혹은 빗발이 날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거사를 앞둔 대구 신명학교(현재의 신명여자중학교 및 신명고등학교) 학생들이 옷을 고쳐 입은 것은 날씨 때문이 아니었다.

“신명학교 여학생들은 만세운동 전날 치마에 조끼허리를 달아맸다고 해요. 한복 치마를 보면 어깨끈이 매달려 있죠? 그걸 조끼허리라고 한답니다. 일본 군경이 학생들의 치마를 잡아당겨 수치를 주거나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는 걸 막기 위해서였지요.”

이영숙 문화해설사가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직 십대의 소녀들이었을 신명학교 학생 40명은 말없이 끈으로 허리춤을 묶고 풀던 치마에 어깨끈을 새로 달았다. 추운 날씨 때문이 아니라 더 날쌔게 도망가기 위해, 일본 군경에게 모욕당하지 않기 위해. 만세운동 날에는 독립선언서를 세숫대야에 담고 빨랫감으로 덮어 이동했다. 빨래터에 가는 것처럼 꾸미기 위해서다. 하지만 만세운동 이후 이들은 모두 체포됐다.

대구의 3·1운동은 학생들이 주도했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1000여명 중 600명가량이 채 스무살도 되지 않은 어린 학생들이었다. 계성학교(현재의 계성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등사해 집결지인 서문시장(현재의 섬유회관 근처)으로 날랐다. 학생들이 군경의 눈을 피해 숨을 죽이고 독립선언서를 날랐던 솔숲길이 지금은 3·1운동길로 조성돼 있다.
 
3·1운동길 터널에는 만세운동의 주축이 됐던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계성학교 아담스관 지하에 등사실이 있었답니다.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한 대구 출신이었던 독립운동가 이갑성이 대구로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보냈고, 학생들이 학교에서 이를 등사했죠.”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계성학교의 교장이었던 아담스 선교사조차 이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혹여 학교나 교장선생님에게 피해가 갈까 봐 학생들이 철저히 비밀에 부쳤기 때문이었다. 계성학교 참가자 46명 중 35명이 일본 군경에 붙잡혀 실형을 선고받았고, 학교는 1년 동안 폐교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독립선언서 등사본은 대구 시내뿐 아니라 멀리는 경북 청송까지 보내져 만세운동에 불을 지폈다고 하니 어린 그들의 노력에 그저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거사 당일, 집결지인 서문시장에 참가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시간은 오후 2시. 교통수단이 미미했던 시기였기에 멀리서 걸어오는 이들을 위한 배려였다. 먼저 남산교회 조사(助事)였던 김태련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하지만 그는 미처 낭독을 마치기도 전에 일본 군경에 끌려 내려왔다. 그와 그의 아들인 김용해는 이날 함께 체포됐고, 모진 고문을 버티지 못한 김용해는 그를 두고 먼저 숨을 거뒀다. 아버지는 군경이 시신을 해코지할까 두려워 다른 이의 이름으로 묘비를 세웠다. 만세 운동 후 20여일이 지난 시점에 발생한 첫번째 희생이었다.

읽다 그친 독립선언서를 마저 낭독한 이는 제일교회의 이만집 목사였다. 이날의 모습은 3·1운동길에 사진으로 전시돼 있다.

“흰옷을 입은 참가자들이 구름떼처럼 서문시장으로 몰려왔죠. 당시에는 서문시장이 가장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이라 의심을 피하기에도 적합했습니다. 학생들, 제일교회와 계산성당교인들, 보현사 스님들까지 각계각층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어요.”

학생과 종교인뿐 아니라 현장에 있던 서문시장 상인들까지 만세운동에 합세했다. 그야말로 ‘민중의 운동’이었다. 서문시장에서 시작된 행진은 학생들이 독립선언서 등사본을 날랐던 길을 따라 제일교회와 계산성당을 지나 청라언덕 3·1운동길 계단까지 이어졌다. 그날 그들이 올랐던 90개계단 곳곳에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어려 있는 듯했다.

김다정 기자     kimdj@nongmin.com

출처 : 농민신문
원문보기 : https://www.nongmin.com/nature/NAT/ETC/307801/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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