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작사부작’ 걷기만 하세요…전주 건지산 둘레길과 숲속 도서관
이 길 소문나면 곤란한데
전주시민이라면 익숙한 건지산. 해발 100m 남짓 낮은 산에는 평일, 주말할 것 없이 시민들이 찾는다. 어린아이부터 어르신들까지 편하게 오를 수 있고, 꼭 정상을 가지 않더라도 주위를 걷는 것만으로도 휴식이 되는 공간이다. 전주동물원이 지척이고,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이나 덕진체련공원과 맞닿아 있어 전주시민들이 자연스럽게 많이 찾는다. 시민들에 가까운 곳인 만큼 계절이 변하는 모습을 느리지만, 오롯이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너무도 익숙해 특별한 것 없는 길에서, 특별함을 찾기 위해 건지산 둘레길을 걸었다
건지산 둘레길은 알려진 대로라면 연화마을부터 혼불문학공원, 오송제, 편백숲, 동물원 뒷길과 건지산 정상, 숲속도서관, 조경단을 지나 다시 연화마을로 돌아오는 길이다. 이번에는 숲속도서관을 시작해 건지산 정상과 편백숲을 지나 오송제, 그리고 덕진공원 연화정 도서관까지 걸었다. 숱하게 걸었고, 익숙한 곳이었지만 5월의 햇살 아래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건지산 입구를 찾기는 쉽다. 여느 산길이 그렇지만, 사람이 많이 다녀 길이 난 곳이 입구다. 이정표도 잘 정돈돼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날은 전주 실내 배드민턴장 근처 데크길에서 시작했다. 5분도 채 걷지 않았는데, 눈앞에 빽빽하게 솟아있는 편백나무가 눈을 시원하게 한다. 시원한 그늘을 걷다 보면 중간중간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신비롭다. 나무 사이 곳곳에 마련된 의자에 잠시 앉아 숨을 크게 들이쉬어도 좋다. 그러다 보면 입에 먹이를 물고 나무사이를 뛰어다니는 청설모와 눈이 마주치기도 한다. 최근에는 무장애 나눔길이라는 데크 공사도 한창이라 앞으로는 누구나 편하게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10여분을 걷다 보면 산속에 아담하게 지어진 나무집 한 채가 불쑥 눈에 들어온다. ‘건지산 숲속 도서관’이다. 큰 창이 난 나무집 안으로 신발을 벗고 들어가면 깔끔하게 정리된 소박한 공간이 마련돼 있다. 작은 도서관 한 면은 책으로 채워져 있고, 다른 삼면은 창문으로 숲과 통하는 구조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면 초록빛 세상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잠시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오늘 산책은 여기서 끝내도 좋겠다”는 마음이 절로 든다. 도서관이라는 이름처럼 이곳에는 사서도 상주하고, 책들도 책장에 빼곡히 들어있다. 도서 대출은 안 되지만, 도서관 안 의자나 바깥 벤치에 앉아 책을 읽을 수도 있다. 창문 앞자리는 대부분 만원이다.
도서관에서의 짧은 휴식을 뒤로하고 ‘정상’이라는 표지판을 보고 길을 오른다. 초여름 풀냄새와 꽃향기가 코를 스친다. 낮은 산이라 정상까지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드문드문 이어진다. 산을 오르는 중간 ‘산스장’(산에 마련된 운동기구를 헬스장에 빗대 표현하는 신조어)에는 간단하게 몸을 푸는 시민들의 모습이 정답고, 나무의자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어르신들도 많다. 유행이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맨발 걷기 열풍은 계속되는 듯하다. 건지산을 오르는 동안 맨발로 산책하는 시민들이 많았다. 정상까지는 20여분 남짓. 어르신들도 편하게 오르는 길이라 쉬지 않고 올랐지만, 나 홀로 가빠지는 숨소리를 애써 숨겼다.
정상에 세워진 정자에서 잠시 한숨을 돌린 후 이번에는 전주동물원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곳곳으로 뻗은 산길을 걷다 보면 정확한 방향을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다른 곳이라면 모르겠지만, 건지산은 안심할 수 있다. 어느 곳으로 가도 길은 이어지고, 곧 가고자 했던 방향을 찾을 수 있다. 산을 오른 시간보다 조금 천천히 내려와 걷다 보면 저 멀리 전주시민은 한 번쯤은 꼭 봤을 전주동물원 드림랜드 대관람차가 눈에 들어온다. 동물원 담장을 옆에 끼고 걷다 보면 건너편에 다시 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온다.
또다시 갈림길이다. 어느 곳으로 걸어도 오송제로 이어진다고 한다. 오송제는 ‘큰 소나무 5그루가 있는 뭇’이란 이름에서 따왔다. 봄이면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푸르름이,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이, 가을에는 오색단풍이 물들고, 겨울이 되면 멋스러운 하얀 옷을 갈아입는다. 산소공장으로 불리는 오리나무가 모여 있는 곳. 각종 곤충과 조류, 상류지역에는 산림청의 희귀·멸종위기식물종인 ‘낙지다리’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도심 속 생태습지다. 지난 2012년에는 체련공원과 송천동을 잇는 도로를 내려 했지만, 시민들의 반대로 무산됐고 지금처럼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거듭났다고 한다.운동을 하러 나온 주민부터 손을 잡고 걷는 연인, 친구들과 함께 나온 어르신들까지, 평일 낮에도 이곳은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듯 여유롭다. 수변데크를 걷다 보면 옆으로 수생식물들이 자라있고, 난간에는 신선처럼 왜가리 한 마리가 앉아있는 모습도 마주칠 수 있다. 오송제에서도 맨발걷기는 여전하다. 맨발로 다녀도 다치지 않을 만큼 황톳길도 잘 조성돼 있고 걷고 난 뒤에는 발을 씻을 수 있는 개수대가 마련돼 있다.
이날 마지막 목적지인 덕진공원 연화정 도서관으로 가기 위해 다시 산길로 걸음을 옮긴다. 편백숲이 있는 건지산 둘레를 걸어도 좋고, 한국소리의전당 쪽으로 나와 걸어도 좋다. 전북대 캠퍼스를 바라보며 덕진공원으로 향한다.
전주시민들에게 덕진공원은 건지산만큼이나 익숙한 공간이다. 여름이면 호수에 피어난 연꽃이 장관을 이루고, 숲 놀이터에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연꽃 군락지인 호수 가운데에는 한옥 건물 한 채가 동양화의 한 장면처럼 세워져 있다. 백미인 연화정도서관이다. 덕진호수를 가로지르는 ‘연화교’는 과거 철로 된 현수교 모양이었지만, 2020년 전통 석교 모양으로 다시 지어졌고 연화교 중간에 있던 ‘연화정’이 도서관으로 탈바꿈했다.
누군가 전주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을 꼽으라면, 한옥마을도 있지만 연화정 도서관을 보여주고 싶다. 전통한옥 형태를 갖춘, 호수 한가운데 세워진 도서관이다. 도서관 공간인 연화당과 문화공간이자 쉼터의 역할을 하는 연화루로 구성돼 있다. 사방이 뻥 뚫려 있어 덕진호수 전경을 볼 수 있다. 도서관 안에서 바라보는 호수 풍경에 감탄이 나온다. 도서관에는 ‘점, 선, 면, 여백, 그리고’라는 열쇳말로 책들이 나뉘어 있다. 마음에 드는 책 한권을 손에 들고 자리에 앉아 책 한번, 풍경 한번 보다 보니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건지산 둘레길, 숲속도서관에서 연화정도서관까지 ‘사부작사부작 꼼지락꼼지락’ 쉬엄쉬엄 천천히 걷기만 하면 되는 길. 익숙한 풍경에 안심되면서도, 계절 따라 새로움을 주는 길. 가장 가까운 길에서 특별함이 느껴졌다.